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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역사

발리의 르네상스와 독립

발리맨 2023. 6. 19. 11:15

발리의 르네상스

발리의 전통문화를 보호하는 정책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1917년 발리의 남부 지역에 지진이 발생한 이후부터였습니다. 이 지진은 약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다음 해였던 1918년에는 전 세계를 휩쓴 독감이 발리를 덮치기도 했습니다. 또한 1919년에는 수 천마리의 생쥐들이 농작지를 습격하여 곡물 생산량에 피해를 준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문제들을 두고 발리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에게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사회적, 정치적 혼란 속에서 발리 사람들은 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상향 드다리라는 빙의 무용 행사를 진행하였고, 바론의 행진을 거행하게 됩니다. 이 두 개의 행사들은 주술적인 의례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를 두고 발리의 전통문화라 칭하게 됩니다. 발리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감명을 받은 네덜란드 사람들은 발리 문화를 지켜주고자 하였으며, 발리의 피해상황을 복구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게 됩니다. 네덜란드의 적극적인 문화 보호 정책 덕에 발리는 마지막 지상낙원이라는 타이틀에서 주술의 의미를 지닌 반신 누드 부녀상과 함께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특히 그레고르 클라우제라는 사람이 발리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그의 사진들을 보고 매료된 서양의 많은 예술가들이 발리를 방문하게 됩니다. 과거 유명한 연예인이었던 찰리 채플린도 발리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1932년 발리를 방문하고 나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실 1920년대에는 발리를 방문하는 관광객의 숫자가 한 해에 약 3천 명 정도였지만,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약 3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발리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가히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발리가 서양에 소개된 후, 이곳은 소위 말하는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세계 각국에서 발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지금의 관광산업에 중심이 되는 가믈란이 탄생하게 되었고, 께짝, 레공 등과 같은 무용공연도 제작되었습니다. 또한 발리의 회화 문화도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사람은 독일인 화가 발터 스피스였습니다. 그는 당시 우붓의 재력가였던 초코르다 스카와티 일족에게 초정을 받아 발리에 오게 되었는데, 그를 통해 멕시코 화가 미겔 코바루비어스, 인류학자였던 마가렛 미드, 오스트리아 작가 비키이 바움 등의 유명인들이 그의 집으로 모여들게 됩니다. 이렇게 점점 발리는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유명해지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관광업이 발전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독립

일본군이 발리를 침공했던 시기는 1942년 2월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네덜란드 군대가 발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은 쉽게 발리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발리를 침공한지 불과 20일 만에 발리의 대부분의 지역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게 됩니다. 발리 사람들은 일본군에 의해 전쟁에 징집당했으며, 이로 인해 불만이 점점 커져갔습니다. 이 시기에 육군 장교로 활약하고 있던 구스티 응우라 라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발리 시민들과 함께 자유군을 결성하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1944년 중반에 이르자, 발리 자유군은 자바와 함께 손을 잡고 항일운동을 진행하게 됩니다.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발리가 독립을 하겠다는 코이소 성명도 발표하게 됩니다. 다음 해인 1945년 4월에는 수카르노라는 인물이 발리의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발리의 시민들 간에 민족 단합의 기운이 높아지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발리 사람들은 소순다 건국 동지회를 결성하였으며, 일본이 전쟁에서 항복하자마자 발리를 독립국가로 인정해 달라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 1945년 8월 17일 수카르노가 자카르타에서 발리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옛 정치체제가 그대로 남아있어 많은 부분이 미흡했습니다. 결국 공화국파가 정치적으로 우세를 점하게 되었고, 195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독립 국가로써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발리는 공화국이라는 이름아래 많은 지역들이 통합되었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측면이 많았습니다. 공산당과 국민당의 첨예한 대립이 정치권 내에 지속되었지만, 1965년에는 공산당 정권이 무너져 현재의 정치 체제를 갖추게 됩니다.